[문화유산기행칼럼] 용봉산을 다녀와서

한국문화유산 찾기와 지킴의 인디아나존스
컬럼니스트 송승희 기자의 문화유산기행 연재

송승희 승인 2023.06.23 10:53 | 최종 수정 2023.06.26 18:06 의견 0

충남 홍성군 홍북읍 상하리에 위치한 용봉산은 위치적으로 22개 군현을 관할했던 홍주목, 홍주읍성 북쪽에 있다하여 북산(北山)이라 불렸다.

지봉유설의 이수광이 기암괴석과 빼어난 경치를 작은 금강산이라 노래했듯이 팔방미인처럼 산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구비하여 충족했고, 사방팔방에 자랑할 만하다하여 팔봉산(八峯山)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용봉산(龍鳳山)이라는 명칭은 당연히 풍수지리의 입장이다. 선인들은 용봉산에서 용과 봉황이 상징하는 이상향의 세계, 즉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신령한 기운이 있음을 보았던 게 분명하다.

충남 홍성군 용봉산

일각에서 용봉산의 높이가 381m에 불과하고, 산맥이 끊겨있는 독산(獨山)이라며, 그 기운을 의심하기도 하지만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있고, 산맥에는 국경이 없으며, 지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비근한 예로 2대 천자지지(天子之地)라며 최고의 명당이라는 남연군묘는 망국(亡國), 그것도 일 만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권을 완전히 빼앗긴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풍수전문가에게 문의를 한 바, 가야산이 원효봉을 지나 덕숭산과 수암산으로 갈라져 내려오는 것으로 볼 때, 활용(活龍-살아있는 기운의 흐름(기자 註))으로 보는 것이지, 신평리 평지로 인해 맥이 끊긴 것으로 보는 것은 지맥의 특성을 외견적으로만 본 견해일 수 있다고 한다. 풍수의 기운은 건재하다는 것이다.

용은 진(辰)으로서 별이다. 아이 벨 신(娠)은 별이 엄마의 몸속에 들어옴이요 생신(生辰)은 별이 세상에 나옴이다. 이처럼 고대 우리민족은 ‘인간은 별에서 왔다가 별로 돌아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별은 파라다이스와 같은 곳으로서 고인돌에는 북두칠성이 주검을 모시는 칠성판으로 이어지고, 용의 다른 말 미르는, 미르→미래→미리내(은하수)로 이어져 영원한 생명의 땅[별]과의 관계를 맺는다.

용과 짝을 이루는 봉황! 수컷은 봉(鳳)으로서 양(陽)요, 암컷은 황(凰)으로서 음(陰)이다. 봉과 황, 음과 양은 조화로서 만물의 이치이며 완성을 이룬다. 그래서 봉황은 부부사랑과 가정의 화합을 시작으로 태평성대가 도래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는 홍주읍성의 아침 해를 맞이하는 동문(東門)인 조양문(朝陽門)에 잘 담겨 있으며 조양은 ‘봉황이 울면 곧 태평성대가 열린다’는 봉명조양(鳳鳴朝陽)을 뜻한다.

따라서 봉황은 태평성대를 열겠다는 염원이며 이러한 측면에서 당시 서세동점(서양 세력의 중국과 조선에 대한 침탈 국제정세)의 외세에 맞서 나라가 위태로울 때 국가 실세였던 흥성대원군이 친필 사액을 내렸다하니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짐작이 간다.

뿐만 아니라 충남도청 이전 과정에서 발굴된 동아시아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신석기시대 환호유적에서부터 조선시대 주거지까지 모든 유적들이 용봉산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배치되어 있다. 이것은 과학문명의 도움 없이 오직 자연에 의지해 살았던 옛사람들의 간절함과 정확한 안목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원시인이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글로 남기지 않았지만 자연을 대하며 생존을 이어왔던 과학적 사유와 행동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사실.. 오히려 현대인들보다 비록 문명의 발전은 미약했으나, 더 영적인 혜안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용봉산에서 가장 기운이 넘치는 곳은 ‘홍성상하리미륵불’ 주변이다.

풍수적으로 보면 산맥이 끝나면서 기운이 응축된 곳에 마치 열매를 품은 것처럼 음(陰)에 해당하는 계란형의 모암(母巖)이 여근석(女根石) 형태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 바로 앞에 음으로부터 씨앗이 뚝 떨어져 나온 듯 8m에 달하는 거석이 우뚝 솟아 양(陽)을 상징한다.

'홍성상하리미륵불'

여기에 미륵불을 조각해 놓았다.

금상첨화 격으로 미륵불 앞에는 마치 산천을 축소해 놓은 형태의 너럭바위가 명당임을 알리는 옥인석(玉印石)으로서 기운을 내뿜고 있으며 더욱 신기한 것은 옥인석에서 우측 45도 상향으로 있는 산 정상을 바라보면 미륵불과 흡사한 바위가 있다는 것이다.

산 정상의 미륵불 바위

수많은 거불(巨佛)들이 조성 될 때 명당이라는 좋은 위치에 석재를 옮기고 쌓아서 만들지만 ‘홍성상하리미륵불’은 인간이 도저히 만들 수 없는 모든 조건이 자연적으로 갖추어져 있어 감히 세상에서 최고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경악스러운 것은 안타깝게도 누가 보더라도 원형지(原形址)를 심각하게 훼손시켰다는 것이다.

현재 미륵불 양쪽은 절개되어 기운이 쇠해진 것처럼 보이고, 앞쪽은 건물에 막혀 훼손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더 이상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쌓아 올린 축대 아래는 수맥이 끊어지지 않고 물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진혈(眞穴) 주위로 크고 작은 혈들이 열매처럼 주렁주렁 응결되어 있는데, 안타까운 것은 그 중에서 미륵불 뒤 대표적인 혈인 바위를 잘라내고 굴을 뚫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문화재와 맞닿아 있는 곳에 말이다.

너무나 기가 막혀 주위 분들께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이외에도 미륵불 앞 너럭바위 아래 있었던 연못은 콘크리트로 매립되었고, 양쪽 절개지와 뒤쪽 굴을 뚫은 곳에는 문화재법을 무시한 사찰건물 3동이 있었는데, 최근에 철거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앞쪽 건물은 왜 철거되지 않았는지 물었더니 개인 소유의 땅에 지어졌고, 문화재 현상변경을 받지 않았지만 등재가 되어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미륵불 앞 너럭바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옥인석의 너럭바위도 일부가 깨어져 나갔고, 남아 있는 부분에는 전동드릴로 타공(打孔)을 시도했던 흔적들이 남아있다. 너럭바위는 절개한 흙을 처리하면서 바위 주변으로 성토되어 어느 정도 묻혔다는 느낌이 들었고, 내려다보이는 작은 연못은 바위들과 함께 어우러져 있었던 것 같이 보였다. 여기에 대해 마을 어르신은 예전의 모습이 정확히 그러했다며 의견을 같이했다.

산이 힘차게 내려오다 끝나는 지점, 10m에 달하는 계란형의 둥근 모암을 배경으로 어디에선가 뚝 떨어진 듯한 8m의 자연석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앞에 지름이 7m가량의 너럭바위, 그 아래 연못이 흐르고, 산 정상에는 이 모습을 내려 보는 자연바위의 미륵불이 있다.

이것이야 말로 자연이 빚어낸 최고 걸작이 아니겠는가.

특히, 불상은 은진미륵, 개태사미륵 등 당시 국가가 주도했던 권위적인 모습과 달리 민중과 소통하려는 소박하고 친근한 형태를 띠고 있다. 따라서 당시 불사를 주도했던 사람은 종교적 입장 보다는 최고의 명당자리에 민중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최고의 상징으로서 미륵불을 조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2001년 <홍성신문>의 자료를 찾아보니, 전병두씨의 증언(당시70)이 있어 이를 요약해 보면, ‘①선친이 생전에 미륵불 앞에 기거하며 돌보고 가꾸었다. ②60년대까지 미륵의 뒤로 높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장삼’을 입혔었다. 장삼은 총 여덟 마나 되었으며, 허리에 두르는 띠는 20여 미터에 달했다. ③예전에 미륵불 정동향으로 절이 있었다. ④미륵불을 진심으로 위하지 않고 소홀하게 모시면 반드시 손실을 입게 된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2021년 6월 〈한얼문화유산연구원〉의 시굴보고서에 따르면 위의 증언대로 미륵불 동쪽에 사찰 터 일부가 발견되었다. 김성구 박사(전 경주박물관장)는 보고서에서 고려초기부터 후기까지의 와편과 자기편이 나오며, 특히 왕자명(王字名) 와편은 매우 특이한 사례로서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를 근거로 고지도의 표기와 문헌 등을 미루어 보면, 고려 공민왕의 왕사에 이어 우왕의 국사를 지냈고, 현재 한국불교 대표종단의 종조(宗祖)와 중흥조(中興祖)로서 불교와 한국철학과 사상의 중심에서 있는 태고 보우의 사리탑을 모셨던 청송사(靑松寺)터 임이 확인된다.

<고려사>, 공민왕 5년 홍주출신의 태고 보우를 왕사로 추대하고 고향인 홍주를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恭愍王五年 以王師普愚內鄕 陞爲牧]

제자 유창의 <태고행장>, 보우 국사의 사리탑을 4곳에 모셨고, 그 중 하나가

용봉산(八峯山) 청송사(靑松寺)이다.

[伐石爲鐘 藏舍利者凡四所 曰陽山 曰舍那 曰靑松 曰太古庵]

취재를 하며 해당 지자체가 무슨 이유에서 년 간 2~300만 명 이상 다녀 갈 수 있는 문화관광자원을 방치하고 있는지에 무척 궁금해졌다. 통계에 따르면 인근 수덕사 년 인원 350만 명, 간월암 130만 명, 그리고 서해안 고속도로에 수덕사를 포함 9개의 교구 본사가 있고, 이와 버금가는 20여개의 사찰, 즉 동일 목적의 관광객들이 옆을 스치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2024년 6월 수도권과 1시간 안에 연결하는 전철의 개통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여기에 대해 홍성군은 미륵불주변은 올해 안에, 용봉산 전체는 내년까지 용역을 마치고, 내년 후반기부터는 용봉산 전체 5구 중 홍성 지역에 있는 4구의 불상을 중심으로 ‘장원급제 둘레길 사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99암자가 있었다는 용봉산에는 현재까지 확인된 야불(野佛) 총7구 중(1구 도난, 1구는 공주박물관 소재) 문화재로 지정된 5구의 불상이 남아 있으며 반경 2Km이내 들판에는 4구의 불상들이 있다. 홍성군은 반드시 이것을 연계하여 문화관광의 자산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본다.

나의 짧은 풍수적 지식이지만 유추해서 본다면, 용봉산과 특히 미륵불은 앞으로 홍성을 먹여 살린다 할 만큼 중요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완벽한 풍수와 자연조건, ②국내 유일 형태의 미륵불, ③태고 보우와 연관한 역사(최영장군의 전설), ④연계된 5구의 불상(풍수의 입장에서 명당) ⑤충남도청의 주산 등은 현대적 관광 스토리텔링은 물론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심성’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홍성군은 지금 당장이라도, 홍성군이 발전을 위해서 현재 미륵불 앞을 가로막아 명당의 기운은 훼손하고 있는 건축물을 철거하고, 절개지 등과 뜬금없이 배바위에 뚫어 놓은 굴을 원상복구 또는 비보를 하여 본래의 기운을 회복시켜야 한다.

세밀히 살펴본바 예상대로 미륵불 양쪽에 인위적으로 움푹움푹 파인 듯 보이는 바위가 배바위로 오르는 중에 있었다. 전국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명당의 정기를 직접 몸에 담기 위해 바위를 갈면서 기도했던 흔적들이다. 이스라엘에 사도 바울이 갇혀 있던 동굴에도 손자국 모양으로 유사한 흔적이 남아 있어 동서양의 연관된 흔적이다. 미륵불이 높이 솟아 있는 관계로 소원을 이루려는 백성들이 미륵의 코를 대신하여 갉아 물에 타먹기도 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훼손된 배바위의 인공 굴

취재를 마치며, 소원을 이루기 위해 바위를 갈아대며 기도했고, 미륵불의 코를 대신해서 바위를 갉아 먹었던 당시 민중들의 심정으로 풍수와 명당의 조건을 완벽히 갖춘 한국 최고의 미륵불이 문화관광 자원으로서 하루 빨리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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